편입, 학교부터 고를까 내 영어부터 볼까
친구가 편입에 붙었다는 소식을 들은 밤, 나도 모르게 입시 사이트부터 켰다. 모집인원, 경쟁률, 지난해 지원 결과를 하나씩 넘기다 보면 갈 만한 학교 이름이 화면에 쌓여 갔다. 그런데 창을 닫는 순간 ‘그래서 나는 오늘 뭘 공부하지?’라는 물음 앞에서 매번 멈춰 섰다.
편입, 학교부터 고를까 내 영어부터 볼까

친구가 편입에 붙었다는 소식을 들은 밤, 나도 모르게 입시 사이트부터 켰다. 모집인원, 경쟁률, 지난해 지원 결과를 하나씩 넘기다 보면 갈 만한 학교 이름이 화면에 쌓여 갔다. 그런데 창을 닫는 순간 ‘그래서 나는 오늘 뭘 공부하지?’라는 물음 앞에서 매번 멈춰 섰다.
목록은 길어지는데 공부는 시작되지 않았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헤맨 뒤에야, 그 어긋남이 순서를 바꿔 놓은 데서 왔다는 걸 알았다. 나는 학교부터 골랐고, 정작 내 영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글은 그때의 내가 순서를 어떻게 바꿨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학교 이름을 고르는 일과 내 영어를 확인하는 일 중 무엇이 먼저였어야 했는지, 나는 뒤늦게야 손으로 배웠다.
목록은 늘어나는데 공부는 안 시작되는 이유
편입을 마음먹으면 학교부터 찾게 된다. 목표가 있어야 움직인다고 배웠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학교 이름은 목표일 뿐 기준이 아니다. 같은 학교를 목표로 삼아도, 지금 내 영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해야 할 공부는 완전히 달라진다. 기준이 빠진 목표는 방향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목록이 아무리 길어져도 첫 페이지를 펴지 못한다.
먼저 정해야 하는 건 학교가 아니라 두 가지다. 지금 내 영어 상태, 그리고 지원하려는 전형의 평가방식. 이 두 가지가 정해지면 그때부터 학교 이름은 목록이 아니라 계획이 된다.
‘싫다’는 감정과 ‘준비’는 다른 일이다

불만은 나쁜 게 아니다. 전공이 안 맞고, 수업이 기대와 다르고, 지난 결과가 아쉬웠던 마음은 변화를 만드는 힘이 된다. 다만 그 감정은 ‘여기가 싫다’까지만 말해 준다. ‘그래서 무엇을 준비할까’는 감정이 대신 답해 주지 않는다.
문제는 이 사이를 건너뛸 때 생긴다. 싫다는 마음을 곧장 학교 검색으로 옮기면, 결심은 했는데 준비는 비어 있는 상태가 길어진다. 감정과 준비 사이에는 ‘확인’이라는 단계가 하나 필요하다.
같은 학교여도 전형이 다르면 다른 시험이다

편입 영어는 학교와 전형마다 요구가 다르다. 어떤 전형은 영어로 당락이 갈리고, 어떤 전형은 평가 방식 자체가 다르다. 학교 이름이 같아도 전형이 다르면 사실상 다른 시험을 준비하는 셈이다. 이름만 보고 자료를 모으면, 지원하는 곳에 필요 없는 공부에 몇 주를 쓰기 쉽다.
그래서 관심 학교를 좁히기 전에 그 학교가 영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부터 확인한다. 모집요강 한 장을 여는 데 드는 시간은 짧지만, 그 한 장이 앞으로 몇 주의 방향을 정한다.
기출은 풀려고 여는 게 아니라 보려고 여는 것

평가방식을 확인했다면 다음은 실제 기출이다. 예를 들어 한양대는 2026학년도와 2025학년도 편입학 인문계열(영어) 문제를 공개하고 있다. 지원을 고려한다면 이런 공개 기출로 지문 길이와 난도, 선지 구성을 직접 볼 수 있다.
이때 기출은 다 풀려고 여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어디서 막히는지를 보려고 여는 것이다. ‘그냥 어렵다’는 넓은 느낌을 ‘세 번째 문단에서 대명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놓쳤다’처럼 좁은 문장으로 바꾸면, 다음에 무엇을 볼지가 정해진다.
단어장을 다 끝낸 다음은 없다
‘단어부터 다 외우고 독해를 시작하자’는 계획은 편입 준비에서 자주 어긋난다. 어휘와 문법은 필요한 기초지만, 단어장을 끝낸 뒤에 독해를 시작하겠다고 미루면 정작 지문에서 막히는 이유를 계속 확인하지 못한다. 기초와 독해는 순서가 아니라 병행이다. 오늘 외운 단어를 오늘 읽는 지문에서 만나야 그 단어가 기억에 남는다.
어려웠던 지점을 문장으로 남기기

혼자 공부할 때 가장 쉽게 사라지는 건 ‘오늘 어려웠다’는 느낌이다. 그 느낌은 기록하지 않으면 다음 공부에 반영되지 않는다. 막힌 지점을 한 줄로 남겨 보자. ‘이 지문은 첫 문단에서 글의 방향을 못 잡았다’고 적으면, 그것이 다음에 확인할 질문이 되고 다음 행동으로 이어진다. 질문은 기록으로 남을 때 비로소 공부가 된다.
이번 주에 할 수 있는 확인
크게 결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 주에 할 수 있는 건 셋이다. 관심 학교의 전형이 영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집요강에서 확인하기. 공개 기출이 있으면 한 지문만 열어 막히는 지점 관찰하기. 그 지점을 한 줄로 기록해 다음 질문으로 남기기. 이 세 가지는 합격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학교 이름 목록을 오늘 손으로 확인할 항목으로 바꿔 준다. 편입 준비의 진짜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나도 제일 먼저 자퇴부터 검색했다
편입을 처음 마음먹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검색창에 친 건 공부법이 아니라 '자퇴 절차'였다. 지금 학교가 싫으니 일단 벗어나고 싶었고, 벗어나는 게 준비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자퇴 후기들을 읽을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벗어나는 방법은 알겠는데, 벗어난 다음에 뭘 공부해야 하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야 깨달은 건, 학교를 그만두는 일과 편입을 준비하는 일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자퇴는 지금 자리를 비우는 일이고, 준비는 갈 자리를 향해 손을 움직이는 일이다. 앞의 것을 해결한다고 뒤의 것이 저절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학교라는 자리를 남겨 둔 채로도, 준비는 얼마든지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순서를 바꿨다. 자퇴를 결정하기 전에, 재학생인 채로 편입 영어 지문 하나를 먼저 열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하니 '싫다'는 감정에만 매여 있던 마음이, '이 지문 어디서 막히지'라는 작은 질문으로 옮겨졌다. 감정은 그대로였지만,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분명히 그때부터였다.
몰아서 하다 감을 놓친 밤
준비 초반의 나는 공부를 몰아서 하는 사람이었다. 주말에 여섯 시간씩 앉아 지문을 열 개쯤 풀고 나면, 뭔가 크게 해낸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늘 그다음이었다. 평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이삼 주를 손 놓고 나면, 다시 앉았을 때 지난번에 잡았던 문장 감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매번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어느 밤, 오랜만에 편 지문의 첫 문단조차 눈에 안 들어오던 순간에야 이유를 알았다. 나는 공부의 양을 쌓고 있었을 뿐, 흐름을 이어 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몰아서 채운 여섯 시간은 며칠만 지나면 새어 나갔고, 남는 건 '했다'는 기억뿐 실제 감각은 아니었다. 독해는 근육 같아서 쉬는 동안 조용히 풀려 버린다는 걸, 그제야 몸으로 이해했다.
그 뒤로는 욕심을 줄였다. 하루에 한 지문, 컨디션이 나쁜 날은 반 지문이라도 매일 여는 쪽으로 바꿨다. 놀랍게도 양은 줄었는데 실력은 더 붙는 느낌이었다. 지난주에 헤매던 구조가 이번 주에 눈에 들어오는 경험이 반복되자, 비로소 공부가 흩어지지 않고 쌓이고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빈 시간표 칸을 편입 자리로 바꾸기
병행이 힘들었던 건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을 매번 새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하루 네 시간 공부'처럼 큰 목표를 세웠는데, 그런 계획은 과제 하나만 겹쳐도 그날로 무너졌다. 무너진 날이 쌓이면 죄책감만 남았고, 그 죄책감은 다음 날 책상 앞에 앉는 걸 더 무겁게 만들었다.
방법을 바꾼 건 내 시간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였다. 수업과 수업 사이에 매주 똑같이 비는 칸이 몇 개 보였다. 나는 그 칸에 새로운 걸 욱여넣는 대신, 이미 비어 있던 그 자리에 '편입 독해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없던 시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있던 시간에 이름을 준 것뿐이었다.
그러자 계획이 훨씬 덜 무너졌다. 그 칸은 원래 비어 있던 시간이라 다른 일과 부딪히지 않았고,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이라 몸이 먼저 그 리듬을 기억했다. 큰 결심 없이도 저절로 이어지는 자리 하나가, 거창하게 짜 둔 계획표보다 나를 훨씬 멀리 데려다줬다.
혼자 붙잡고 있지 말 걸 그랬다
돌아보면 가장 아까운 시간은 혼자 끙끙대던 며칠이었다. 어떤 지문은 아무리 읽어도 구조가 안 잡혔고, 내 실력이 지원하려는 전형에 얼마나 못 미치는지도 스스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혼자 붙잡고 있는 게 성실함이라고 착각했다. 사실은 물어볼 데를 미리 정해 두지 않아서 그냥 막혀 있었던 것뿐인데 말이다.
내가 뒤늦게 배운 건, 좋은 질문은 막막함을 통째로 던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보다 '이 문단에서 대명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못 찾겠어요'가 훨씬 빠른 답을 불렀다. 질문을 좁게 다듬는 순간, 막혀 있던 며칠이 하루로 줄어들었다.
자퇴서는 서랍에 넣어 두기로 했다
한동안 나는 자퇴서를 마음속 책상 위에 늘 올려 두고 살았다.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냥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정작 편입 공부에 마음을 붙이기가 더 어려웠다. 결정하지 못한 큰 문제가 머리 한구석을 계속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자퇴서를 잠시 서랍에 넣어 두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대신 몇 주 동안은 오직 확인만 하기로 했다. 관심 전형이 영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집요강을 열어 보고, 공개 기출 한 지문에서 어디가 막히는지 살펴보고, 그 지점을 한 줄로 적어 두는 일만 반복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신기한 일이 생겼다. '나는 이 준비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조금은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퇴를 할지 말지는 그 감각이 생긴 다음에 정해도 늦지 않았다. 큰 결정은 결심으로 앞당기는 게 아니라, 쌓인 확인이 데려다준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남들 속도에 자꾸 흔들리던 시기
자퇴서를 서랍에 넣어 두기로 마음먹고도 한동안은 자꾸 딴 데를 봤다. 특히 나를 흔든 건 남들의 속도였다. 같이 편입을 준비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누구는 벌써 단어장을 몇 회독 했다더라, 누구는 하루에 지문을 몇 개씩 본다더라 하는 말들이 마음에 콕콕 박혔다. 그럴 때마다 내 하루 한 지문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고, 이 속도로 되겠나 하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조급해지면 이상하게 공부가 더 안 됐다. 남들만큼 하려고 하루에 지문을 서너 개씩 몰아 보면, 그날은 뿌듯했지만 다음 날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양으로 남을 따라잡으려 할수록, 정작 내 안에 쌓이는 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동안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의 속도를 내 속도인 양 끌어다 쓰려고만 했다. 그 무리한 며칠이 지나면 어김없이 지쳐서, 오히려 아무것도 못 하는 날이 따라왔다.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꾼 건 어느 밤이었다. 남들 페이스에 맞춰 무리하게 밀어붙인 한 주가 끝났는데, 정작 머리에 남은 건 거의 없었다. 반면 컨디션대로 하루 한 지문씩 천천히 봤던 그 전 주의 문장들은 오히려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때 깨달았다. 남의 속도는 남의 것이고, 내가 실제로 쌓을 수 있는 건 내 리듬 안에서만 만들어진다는 걸. 빠르게 지나간 한 주보다 느리게 붙든 한 주가 더 많이 남는다는 게 낯설면서도 분명했다.
그 뒤로는 남들 이야기가 들려도 예전만큼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물론 완전히 초연해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누가 빠르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술렁였다. 다만 그럴 때마다 '저건 저 사람의 속도지 내 것이 아니다'라고 스스로에게 한 번 말해 주는 습관이 생겼다. 그 한마디가 조급함을 완전히 없애 주진 못해도, 다시 내 지문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기에 내가 붙잡아야 했던 건 남보다 빠른 속도가 아니라 내가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속도였다. 빠르지만 사흘 만에 지치는 속도보다, 느려도 몇 달을 이어 갈 수 있는 속도가 결국 나를 더 멀리 데려다줬다. 남과 나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던 버릇을 내려놓은 게, 그 무렵 내가 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공부가 내 것이 되기 시작했다.
불만을 확인 목록으로 바꿔 적어 본 저녁
자퇴서를 서랍에 넣긴 했지만, 학교에 대한 불만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수업을 들으면 답답했고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은 날이 있었다. 다만 그 불만을 자퇴라는 큰 결정으로 곧장 연결하지 않기로 했을 뿐, 감정은 그대로 남아 나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다 어느 저녁, 그 뭉뚱그려진 불만을 종이에 한번 펼쳐 보기로 했다.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걸 눈으로 한번 보고 싶었다.
왼쪽에는 학교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적고, 오른쪽에는 편입을 하면 그게 실제로 달라지는지를 적었다. 막상 적어 보니 내 불만이 생각보다 뒤섞여 있다는 걸 알았다. '통학이 너무 힘들다'는 학교를 옮기면 분명히 나아질 항목이었지만, '공부에 의욕이 안 생긴다'는 학교 문제인지 그냥 내 상태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서 오른쪽 칸을 한참 비워 뒀다. 그 빈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그 빈칸이 오히려 나에게 많은 걸 알려 줬다. 내가 '학교가 싫다'고 뭉쳐서 말할 때, 사실 그 안에는 편입으로 풀리는 불만과 그렇지 않은 불만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편입은 내 불만의 전부를 해결해 주는 문이 아니라 그중 일부를 정확히 겨누는 선택이라는 걸, 그 표를 채우고 나서야 처음으로 또렷하게 알았다. 감정으로만 알던 걸 손으로 확인한 셈이었다.
그날 이후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불만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 불만이 더 이상 '전부 다 싫다'는 거대한 덩어리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편입이 건드릴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나뉘고 나니,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지문을 펴는지가 분명해졌다. 막연한 탈출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유를 가진 준비로 바뀐 것이다. 이유가 또렷해지자 책상 앞에 앉는 일도 전보다 덜 무거워졌다.
지금도 나는 그 한 장을 버리지 않고 두었다. 준비를 하다 마음이 흔들리는 날이면 다시 꺼내 본다. 그러면 처음에 내가 왜 이걸 시작했는지, 편입이 내 불만 중 어디를 겨누고 있었는지가 다시 떠오른다. 그 저녁에 종이 한 장을 채운 일이, 이후의 흔들리는 날들을 붙잡아 주는 뿌리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큰 결심 하나보다 그 작은 종이 한 장이 나를 더 오래 버티게 해 주었다.
그때의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
지금 편입 준비를 돌아보면, 실력이 부족해서 힘들었던 시간보다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서 헤맨 시간이 더 많았다. 학교가 싫다는 감정, 남들보다 느리다는 조급함, 자퇴를 할지 말지 하는 큰 결정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작 지문 하나를 차분히 볼 여유는 그 감정들에 다 밀려나 있었다. 그래서 만약 그 시절의 나에게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공부법보다 마음 다루는 법을 먼저 말해 주고 싶다.
가장 먼저 해 주고 싶은 말은, 큰 결정을 서둘러 내리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퇴를 지금 당장 정하지 않아도 편입 준비는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 오히려 큰 결정을 잠시 미뤄 두고 '오늘의 확인'만 쌓아 가는 편이, 나중에 그 결정을 훨씬 덜 흔들리게 내리도록 도와준다. 결정은 마음이 급할 때가 아니라, 확인이 충분히 쌓였을 때 저절로 무르익는다는 걸 그때의 나는 몰랐다.
두 번째로는, 혼자 끙끙대는 걸 성실함이라 착각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나는 막힌 지문을 며칠씩 혼자 붙들고 있는 게 노력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물어볼 곳을 정해 두지 않아 낭비한 시간이었다. 막히기 전에 물어볼 창구 하나만 정해 두었어도, 그 며칠은 하루로 줄었을 것이다. 성실함은 혼자 오래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막혔을 때 다음 행동으로 빨리 넘어가는 데 있었다.
세 번째로는, 남과 나를 나란히 세워 놓고 재지 말라는 것이다. 남의 속도는 남의 출발선에서 나온 것이고, 내가 쌓을 수 있는 건 오직 내 리듬 안에서만 만들어진다. 하루 반 지문이라도 매일 여는 사람이, 사흘 몰아치고 나흘 쉬는 사람보다 결국 멀리 간다.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내가 여러 번 무너지고 나서야 몸으로 배운 것이다. 그러니 남의 속도가 부러운 날일수록 내 리듬을 더 붙잡았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지금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시작된 고민이라도 그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 불만은 잘못된 게 아니라, 다만 자퇴서가 아니라 오늘의 확인으로 옮겨야 할 에너지였을 뿐이다. 나는 그 에너지를 종이 한 장과 하루 한 지문으로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때의 나처럼 지금 흔들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결정을 서두르기 전에 오늘 확인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손에 쥐어 보라고, 딱 그 말을 해 주고 싶다.
오늘 할 수 있는 하나의 확인부터
돌이켜 보면 내가 가장 자주 무너졌던 건 계획이 커질 때였다. 한 달 뒤의 나, 일 년 뒤의 나를 자꾸 상상하다 보면 지금 책상 앞의 나는 늘 초라해 보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계획을 잘게 쪼갰다. 이번 주에 무엇을 다 끝내겠다는 거창한 다짐 대신, 오늘 딱 하나 확인할 것을 정하는 쪽으로 방식을 바꿨다. 오늘의 확인이 하루를 닫는 매듭이 되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예를 들어 어떤 날은 관심 있는 학교의 편입 모집 시기가 봄인지 가을인지, 그 하나만 확인하고 하루를 닫았다. 또 어떤 날은 지난주에 풀다 막힌 지문 한 개를 다시 펼쳐, 어디서 걸렸는지 한 줄로 적어 두는 게 그날의 전부였다. 대단한 진도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매일 하나씩 확인한 것들이 종이 위에 쌓이자 내 상황이 처음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막연한 불안이 확인할 수 있는 목록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내가 곁에서 지켜본 한 학생은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매일 저녁 오 분씩 그날의 기록을 남겼다. 그 학생은 오늘 시험을 잘 봤는지가 아니라, 오늘 무엇을 새로 알게 됐고 어디서 막혔는지를 적었다. 그렇게 남긴 기록을 주말마다 한 번씩 펼쳐 놓고 이번 주의 흐름을 스스로 점검했다고 했다. 점검이라고 해서 거창한 반성이 아니라, 어떤 요일에 집중이 잘 됐고 어떤 상황에서 무너졌는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 작은 점검이 다음 주의 리듬을 조금씩 고쳐 주었다.
나에게도 그 방식은 큰 힘이 되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날이면 나는 그동안 쌓인 기록을 처음부터 천천히 넘겨 봤다. 거기에는 잘한 날도 있었고 아무것도 못 한 날도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멈춰 서 있지만은 않았다는 증거가 남아 있었다. 그 증거가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는 감정의 거짓말을 조용히 반박해 주었다. 감정은 늘 나를 과소평가했지만, 기록은 언제나 나를 정직하게 보여 주었다.
그러니 지금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 편입을 떠올린 누군가가 있다면, 오늘 당장 큰 결정을 내리려 애쓰기보다 오늘 확인할 수 있는 하나부터 손에 쥐어 보길 권하고 싶다. 이번 주의 목표를 거창하게 세우는 대신, 오늘 저녁 딱 한 줄의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시작해도 충분하다. 그 한 줄이 모여 내 상황을 보여 주고, 그 상황을 스스로 점검하는 힘이 결국 나를 다음 자리로 데려간다. 나는 그 느린 길이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고, 지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같은 자리에서 멈춰 있는 사람이 있다면, 완벽하게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막히기 전에 물어볼 곳 하나를 정해 두길 권하고 싶다: https://blog.verajin.com/go/kakao?src=personal_blog&p=pkg_2245a5ec69cd&pos=1